지리산 | 천왕봉 일출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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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혜림산악회 조회4,416 작성일14-09-09 21:28본문
지리산 로터리대피소의 총 수용 인원은 35명이다. 그 중에서 우리 일행이 12자리를 예약했으니 대단한 성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2인승 승합차를 가득 채워서 오전 11시 하단 로터리를 출발했다. 추석 귀성 차량들 때문에 아무래도 마산, 창원 지역을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거가대교를 타고 거제를 경유해서 통영 대전간 고속도로로 진입하였다. 추석 연휴동안 일기가 좋아 전국에서 달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예보를 들었는데 지금은 한 방울씩 비가 뿌리고 있다. 예보를 믿긴 하겠지만 경험상으로 볼 때 일말의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오후 2시 반에 중산리에 도착했다. 파란 하늘이 활짝 열려서 날씨 걱정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이번 보름달은 올해 두 번째로 큰 슈퍼문(moon)이라는 소식이다. 지리산 속에서 달구경을 하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2시간 정도면 중산리에서 로터리대피소까지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배낭이 너무 무겁다. 거의 대부분을 대피소에서 판매한다는 걸 알긴 하지만 이번은 추석 산행이다. 추석 산행에 인스턴트를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쌀3킬로, 김치, 갈치속젓, 라면 25봉, 김치찌개, 냉동 참치에 자연산 돌김, 1인당 4홉들이 소주 한 병씩, 미역국, 된장국, 한우쇠고기 12인분, 그리고 내일 새벽 천왕봉에서 차례를 지낼 사과, 배 등을 준비했다. 거기에다가 나는 내일 새벽 천왕일출을 담기위해 DSLR 카메라와 작은 삼각대를 넣었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2시간 반 만인 오후 5시 대피소에 도착했다. 준비한 만큼 대단한 성찬이 벌어졌다. 숨겨서 가지고 온 보드카가 나오고 21년 산 발렌타인도 나온다. ‘이 사람들 엄청 기대하고 이번 산행 왔는가베?’ 혼자 속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내일 새벽 일출을 담아야 한다. 일출 시간은 6시 10분이다. 적어도 4시 반에는 천왕봉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자리를 잡아서 천문박명, 항해박명, 시민박명을 차례로 다 담고 일출을 담을 수 있다. 2시 반에 일어나서 늦어도 새벽 3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소주 한 잔 마시고 나는 입을 닫았다.
저녁 8시, 중천에 달이 올라온다. 평소 때 보다 15% 더 크고, 30% 더 밝다고 하는 슈퍼문이다. 아직 약간은 이지러져 있지만 달 속의 분화구들은 다 보인다. 모두들 달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 때 법계사 쪽에서 왠 아지매 세 명이 내려온다. 물론 산행객들이다. 대피소 관리인에게 잘 곳이 있는지 물어보는 눈치다. 예약은 물론 하지 않았고 예약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그렇다면 초보 산행인들일 것인데 어떻게 이 늦은 시간까지 산 속에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마음에 아지매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그 다음에 발생했다. 예약을 안했으니 재워줄 수 없다는 관리인의 말이다. 법계사에 가서 알아보든지 아니면 하산하든지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어안이 벙벙하다. 아무리 대피소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하더라도 이 늦은 시간에 산 속을 그냥 내려가라고 하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그 아지매들 내려가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어쩌란 말인가. 예약도 안하고 왔으니 자기들 자신 책임이라고 할 것인가? 솔직히 우리자리라도 비워줬으면 좋겠으나 그럴 수도 없고, 중산리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올라올 수는 더욱더 없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진정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묻고 싶다. 대피소가 존재하는 이유가 산행객들의 안전을 위해서인데 예약을 하지 않았다고 밤늦은 시간에 그것도 여자들을 산속으로 쫓아내는 대피소라면 차라리 이름을 바꾸는게 낫지 않겠는가? 운영 방법보다는 사람의 안전이 당연히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당연히 우선되어야 하는 것들이 무시되어서 세월호같은 사건도 일어난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이다.
저녁에 그렇게 퍼마시고도 새벽 2시 반에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다들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정말 한국 사람들 화끈한 사람들이다.’ 라고 한 번 더 생각했다. 개선문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는다. 북동쪽하늘에서 보이는 오리온자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이고 바람도 없다. 비록 여름이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가 되는 오늘 천왕일출이다. 4시 반, 드디어 천왕봉이다. 아직 천문박명이 시작되지 않았고 아무도 없다. 내가 일착이다. 제일 전망이 좋은 자리 ‘일출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는 정상석 바로 앞자리를 차지하고 삼각대를 설치했다. 기온이 영하는 아니지만 많이 춥다. 모자를 덮어쓰고 장갑을 낀다. 카메라를 삼각대에 설치하고 렌즈는 모든 사진가들의 로망, 캐논 24-70을 끼웠다. 릴리즈를 카메라 바디에 꼽고 릴리즈 버튼을 왼손 엄지로 살며시 쓰다듬는다. 천문박명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모든 준비는 끝났다. ISO 400, F5,6, 화각 24밀리, 노출 10초로 설정하고 릴리즈를 눌렀다. ‘찰칵’하는 부드러운 음향이 고막을 때리면서 나의 첫 커트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아득히 먼 동쪽 하늘이 오렌지 색깔로 물들면서 그 위에 생전 처음 보는 새파란 하늘이 생겨난다. 또 그 위에는 아직 새까만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다. 천문박명이다. 하늘이 열리면서 장터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린다. 이제부터는 초단위로 하늘이 열리고 눈 깜박할 사이에 일출이 전개될 것이다. 주위가 점점 밝아지면서 촬영조건을 바꾸는 내 손 놀림도 점점 더 바빠진다. 수없이 릴리즈 버튼을 눌러댄다. 그 순간, ‘온다!’.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주위를 온통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면서 노란 어떤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덩어리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맑은 모습으로 점점 더 크게 더 동그랗게 모습을 보이고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차갑게 죽어있던 사람들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진다.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비로소 주위를 돌아다본다. 정상에는 수많은 산행객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이 들어 서 있다. 시뻘건 태양의 열기가 공기를 덥히고 산을 덥히고 내 얼굴도 따뜻하게 덥히고 있다. 계곡에서는 뭉게뭉게 흰 구름이 올라오고 커튼이 쳐지듯이 하늘은 파란 색깔로 마침내 물들고 만다. 세상은 이렇게 창조되는 것일까?
조촐하지만 정상석 아래에 제단을 차리고 술과 밥, 국, 사과, 배를 올린다. 주위에 술 한 잔을 뿌리고 절을 한다. 일출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우리 산악회가 안전한 산행, 즐거운 산행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삼배를 했다. 모두들 아직 일출의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수없이 지리산을 다녀도 오늘과 같은 일출은 아무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누구는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기도 하지만 또 누구는 우리들처럼 3대에 걸쳐 덕을 쌓은 사람 옆에 있다가 덕분에, 일출을 보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人生이라고 나는 또 생각한다. 7시에 정상을 출발하여 중봉을 거쳐 10시쯤 치밭목에 도착했다. 치밭목 산장은 개인 소유의 산장이다. 치밭목에서 라면을 끓이고 찌개를 데워 아침을 먹고 내려간다. 중봉에서 유평리로 내려오는 길은 험한 돌길이었고 국립공원치고는 많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천왕봉에서 10킬로, 유평리에 13시에 도착하였고 역사적인 추석맞이 지리산 천왕일출 산행을 모두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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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일출 사진이 예사롭지 않군요. 장관입니다.
저녁 슈퍼문의 풍광도 가히 짐작이 갑니다. 고생한 만큼 느끼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혜림 산악회 산행기를 읽으면 산행하고픈 욕구가 느껴집니다. 특히 산행철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더더욱. 즐감합니다.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항상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함니데이 ~~~~ ^^
혜림산악회님의 댓글
혜림산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