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 지리산 남부능선 종주산행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혜림산악회 조회4,707 작성일15-06-01 15:27본문
거림(巨林).
아름드리 고목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어서 시커멓게 하늘을 가리는 계곡으로 그래서 이름도 ‘거림’이다. 연하봉과 세석대피소가 있는 촛대봉 사이에서 계곡이 발원하여 장장(長長) 8킬로를 내려간다. 오늘은 거림으로 올라가 세석대피소에서부터 삼신봉을 거쳐 쌍계사로 내려가는 약 23킬로, 지리산 남부능선 종주를 한다.
금요일, 토요일 연 이틀 과음을 하고 무리를 했더니 치질이 도졌다. 토요일 아침에 조금 이상하더니 토요일 밤쯤 되니까 항문 오른쪽이 갑자기 튀어나오면서 욱신욱신 통증이 생기는 것이다. 좌욕을 하고 쉬었다면 조금 더 나아졌을 텐데 통증에도 불구하고 무슨 큰일 씩이나 한다고 죽치고 퍼마셨더니만 잘 때쯤에는 욱신욱신하는 통증 때문에 잠까지 설쳐댔던 것이다. 술도 안 깬 푸석푸석한 얼굴에 눈곱만 떼고, 08시 10분 산행을 시작하는데 엉덩이 저 밑으로부터 아련하게 솟아올라오는 통증이 오르막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똥침을 맞는 것처럼 쿡쿡 쑤시고 있다. 멍한 머리로 잔뜩 인상을 쓰고 올라가고 있는데 하늘은 마치 여봐란 듯이 새파랗게 청명한 하늘이다. 술을 끊어야 할 것인지 잠깐 고민을 했다.
거림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약 6킬로, 3시간 오르막길이다. 치질통(痔疾痛) 때문에 어차피 앉기도 불편하고 해서 쉬지도 않고 2시간 반 만에 세석까지 올라갔다. 너무 아프니까 항문 통증만 빼고 다른 감각들은 다 무뎌지는 것 같다. 오로지 엉덩이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에만 저절로 집중하게 되는데 통증에 집중하니 잡생각도 잘 들지 않는 것이 머리는 점점 더 맑아지는 것 같다. 먹구름 가운데 비치는 한줄기 서광처럼 혹은 새파랗게 청명한 지금의 하늘처럼 머릿속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맑아지고 있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 한 가지 화두(話頭)를 부여잡고 수개월씩 동안거, 하안거에 들어가 도를 깨치는 것도 이런 방식이 아닐까? 도(道)를 닦는 사람들이 왜 일부러 고행(苦行)을 하는 지 이해가 될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치질통을 가지고 고행을 하는 도인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11시, 물병에 물을 잔뜩 채우고 세석을 출발하여 지리산 남부능선 종주산행을 스타트한다. 지리산은 성삼재에서 시작하여 노고단, 반야봉, 영신봉, 제석봉, 천왕봉에 이르는 능선을 주능선(主稜線)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삼재에서 고리봉, 바래봉에 이르는 쪽을 서북(西北)능선이라고 하고 세석에서 삼신봉, 쌍계사에 이르는 능선을 남부능선이라고 하는데 여기가 또 ‘낙남정맥(落南靜脈)’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청학동에서 삼신봉으로 올라오는 갈림길에 도착했는데 재작년 우리 산악회에서 정기산행으로 청학동에서 삼신봉을 올라 삼성궁으로 내려가는 산행을 했었다. 그때는 삼신봉(三神峰)이 지리산 능선 어디쯤 있는 산이라고 들어도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입체감이 없었는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 내 머릿속에는 남부능선 가운데 올라오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지도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다시 진행하는데 올라오고 내려가고 하면서 비교적 평탄한 능선길을 치질통에 집중하면서 계속 걸어간다.
14시 40분, 내(內) 삼신봉(1,284m)에 도착했다. 노고단에서부터 천왕봉에 이르는 지리산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시원하게 한 눈에 펼쳐진다. 오리지날 백두대간(白頭大幹) 길인데 백두산에서 시작하는 대간의 종점이 천왕봉(天王峰)인 것이다. 단체로 모여 인증샷을 찍고 다시 계속 진행한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계속 진행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이 생긴다. 완주야 하겠지만 일몰시간이 걱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힘을 모아 다 같이 완주(完走)해 보자는 결정을 한다. 그만큼 이곳 남부능선은 다시 오기가 힘든 곳이다.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종주산행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대부분 세석에서 청학동으로 내려가거나 아니면 청학동에서 삼성궁으로 내려가는 것이지 종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세석에서 쌍계사로 간다고 하니까 다들 세석에서 하룻밤 자고 산행하는 줄 아는 것이다. 무박으로 하기에는 힘든 코스이지만 해가 긴 시기니까 한 번 도전 해 보는 것인데 치질이 생겨 이런 생고생을 하게 될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
17시 15분, 외(外) 삼신봉을 지나 상불재에 도착했다. 이제 쌍계사까지는 4.9킬로가 남았다. 남부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는 성제봉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제봉으로 가는 탐방로가 없다. 그래서 쌍계사까지를 종주산행의 종점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돌길로 이루어진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이런 식으로 가면 두 시간도 더 걸릴 것 같은데 진짜 일몰시간이 걱정되는 것이다. 다음번에 종주를 할 때는 꼭 손전등을 챙겨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한다.
일몰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돌길을 내려가다가 생각해 보니 치질통이 사라졌다. 사라진 게 아니라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발바닥과 무릎에 새로운 통증이 생기다 보니 감각이 분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쌍계사 계곡을 한 번은 오른쪽으로 돌고 또 한 번은 왼쪽으로 돌면서 몇 번을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내리막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내려오다 보니 멀리 쌍계사에서 바라를 치는 소리가 들린다.
- 뎅 ~~
몇 신가 싶어 시계를 보니 6시 38분인데 6시 반도 아니고 7시도 아니고 왜 이 시간에 바라를 치는 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됐든 이제 쌍계사 까지는 2킬로도 안 남았다. 시간에 쫓겨 언제 또 와 볼지도 모르는 불일폭포도 그냥 지나쳐 간다.
19시 15분, 거림을 출발한 지 11시간 만에 쌍계사에 도착했다. 아직 해는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도 꽤 급하게 뛰다시피 걸어왔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일행들도 어지간히 급하게 왔는지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11명 모두가 해가 지기 전에 하산을 했다. 발, 발목, 무릎 모두가 아프다고 아우성인데 이제서야 그동안 까먹고 있었던 치질통이 갑자기 생각난다. 쌍계사 아래 계곡물에 몸을 담근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찌르르하고 냉기가 퍼진다. 팔다리를 씻다가 튀어나온 치질 쪽을 찬물 수건으로 가만히 찜질한다. 뜨신 방에서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던 통증이 슬며시 물러간다.
- 아 ~
통증이 물러난 자리를 조용한 신음이 대신한다. 모두들 알다시피 멀리서 행복을 찾을 필요가 없다. 아프던 곳이 아프지 않게 되면 누구나 저절로 행복해 지는 것이다. 쌍계사 앞 식당에 모두 모여 앉았다. 시간이 늦었지만 뒤풀이 겸 저녁 식사를 다 같이 하는 것이다. 은어회를 시키고 참게탕으로 안주를 해서 소주를 한 잔 곁들이는데 성수행님이 한마디 한다.
- 우리 총무가 아프긴 마이 아픈 모양이다. 그리 좋아하는 술을 입에도 안대네?
‘행님, 더 이상 불행해지기 싫거든예 ..’
총 2건 / 최대 200자
혜림 산악회의 산행기를 읽으면 많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우선 풍부한 콘텐츠와 재미난 산행기.. 직접산행하지 않더라도 느끼는
간접적 힐링을 체험하는 듯합니다. 항상감사합니다.
여기부산님의 댓글
여기부산네 ^^ 감사함니다,
혜림산악회님의 댓글
혜림산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