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 시리즈

[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681. 영선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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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펀부산 조회191 작성일20-09-22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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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구 영주동과 대청동·보수동을 잇는 영선고개. 350년 역사를 품은 옛길인 영선고개는 조선시대에는 국제 교류의 길이었으며 한국전쟁으로 어수선하던 때에는 박애를 실천하고 재기를 도모하던 길이었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영선고개, 한국인 거주지.’ 부산 중구 대청동 부산근대역사관에 전시된 흑백사진 제목이다. 100년은 훨씬 지난 사진이다. 갓 쓴 영감과 색동저고리 여자아이, 광주리 인 여인이 고갯길 타닥타닥 걸어가고 고갯길 양쪽으로 초가집 다닥다닥 이어진다. 초가집 저 너머는 바다. 매립해 부산역이 들어섰지 싶은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여리고 순하다.

 

부산 중구 영선고개는 350년 역사를 품은 옛길이다. 350년 전 그때는 국제 교류의 길이었으며 한국전쟁으로 어수선하던 때에는 박애를 실천하고 재기를 도모하던 길이었다.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 되는 해. 영선고개를 새삼 걷는 이유다. 내 유년의 숨결과 추억이 스민 길, 영선고개. 한 걸음 한 걸음,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조선시대 동래서 왜관 가는 유일한 길

한국전쟁 피난민 영주동 ‘산만디’ 몰려

美 수녀회가 세운 메리놀병원 ‘눈길’

수녀들이 짐꾼 자처 약품 지고 오르내려

유엔군이 제일 먼저 도로 포장하기도


보수동 헌책방 골목.
▲ 보수동 헌책방 골목.

 

영선고개는 18세기 그림에 나온다. 동래부사 행렬을 그린 기록화다. 비탈길 구부러진 마디마디, 소나무 구부러진 마디마디 하도 생생해서 사진을 보는 듯하다. 행렬은 동래읍성에서 출발해 온천천 세병교, 부산진성을 거쳐 영선고개를 지난다. 행렬이 당도한 곳은 용두산 왜관. 왜관에선 일본 사신이 대기한다.

 

“영선고개가 영주동에 있어요? 영도에 있지 않나요?” 영선고개란 이름은 어디서 나왔을까? 영도구에 영선동이 있는 바람에 모르는 사람은 영도 어디 고개쯤으로 안다. 그러나 영선동과 영선고개는 쓰는 한자가 엄연히 다르다. 영도구 영선동은 신선을 뜻하는 영선(瀛仙)이고 중구 영주동 영선고개는 ‘집을 짓거나 수리한다’는 영선(營繕)이다. 영주동과 대청동 사이에 있던 영선산(營繕山) 고개가 영선고개다.

 

영선산은 왜 영선산일까. 좋은 이름 놔두고 하필이면 집수리 운운하는 이름으로 지었을까. 그 내력을 알면 향토사학자 급으로 수준이 격상한다. 왜관은 조선에 있던 일본인 마을. 왜관을 통해 조선과 일본은 교역했다. 못 먹고 못 입던 궁핍한 나라 일본에 대한 조선의 배려였고 아량이었다. 왜관은 조선시대 국제 교류의 전초기지였으며 대외 선린외교의 표상이었다.

 

부산 왜관은 동구 수정동에 있었다. 부산일보 근처 고관이라 불리는 거기다. 그러다 용두산 일대로 옮기게 되었다. 그때가 1670년 무렵. 350년 전이다. 수정동 고관에 있던 집채 기둥이며 지붕이며 짐을 용두산 왜관으로 옮기려는데 난관이 생겼다. 산이 가로막았다. 급기야 산길을 내어서 길을 텄다. 나무가 졸지에 수난을 겪었다. 길을 막는 나무는 모조리 베었고 괜찮다 싶은 나무는 왜관 신축건물 자재로 썼다. ‘영선’이란 이름은 거기서 비롯했다. 산은 영선산으로 불렸고 산길은 영선고개로 불렸다.

 

영선고개는 그때 유일한 길이었다. 호시절이었다. 그러다 일제가 득세하면서 찌그러졌다. 중앙동 부두와 초량동 기차역이 따로 놀면서 아침저녁 눈총을 받았다. 급기야 산이 헐렸고 고개가 헐렸다. 땅은 평평해졌고 흙과 돌은 바다를 메웠다. 지금 부산역 일대가 그때 메운 바다다. 길은 악바리. 없앤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여기를 막으면 저기가 뚫린다. 영선고개 역시 다시 살아났다. 위치를 약간 바꾸어 350년 부산 옛길의 역사를 지금껏 이어 간다.

 

나는 여기 출신이다.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도 북청 피난민. 영주동에 터를 잡았다. 형제가 많아 공책이며 연필 따위 학용품은 국제시장에서 한꺼번에 샀다. 도매로 사면 쌌다. 영주동과 국제시장 사이에 영선고개가 있었다. 누나 손에 이끌려 형 둘과 졸래졸래 고개를 넘었다. 푼돈을 남겨 국제시장 좌판에서 사 먹던 ‘꼼장어 묵’은 이 나이 돼서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술안주다.

 

영선고개를 걷는다. 시작은 영주시장. 시장을 빠져나와 도로 건널목에 선다. 건널목을 건너서 이리 가면 초등학교 모교, 저리 가면 영선고개다. 휴대폰 사진기에 또 담고 또 담느라 걸음이 느려 터진다. 돌아보면 아득한 날들. 처음은 보이지도 않는다. 여행길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면 인생길은 처음에서 멀어지는 길. 너무 멀리 왔다. 고개에 부는 바람은 그나마 처음 그대로다. 숨통이 트인다.

 

‘박애의 고개, 재기의 고개.’ 세월이 흘러 영선고개도 숨통이 트였다. 조선시대 동래에서 왜관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영선고개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시대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이리로 다니는 사람이 기하급수 늘어났다. 전쟁 터지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 미국 메리놀수녀회가 세운 메리놀병원은 영선고개에 터를 잡고 박애를 실천했다. 영주동 ‘산만디’에 몰려든 피난민은 영선고개를 오르내리며 재기를 도모했다.

 

고갯길 오른 지 10분 남짓. 고갯마루 산뜻한 건물이 눈길을 끈다. 메리놀병원이다. 수녀회에서 세운 병원답게 언제 봐도 단아하고 단정하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그때 미국인 수녀들은 짐꾼을 자처했다. 약품을 지거나이고서 ‘산만디’ 비탈길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 약값이며 치료비며 죄다 공짜였다. 영선고개는 유엔군이 부산에서 제일 먼저 포장한 도로였다. 짐꾼 수녀가 안쓰러워 하루라도 빨리 포장해 드리고 싶었으리라. 포장도로는 유엔군 부상자 치료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영선고개는 한동안 유엔고개, 유엔도로로 불렸다.

 

‘함경도에서 피난 온 한 부부가 최초로 헌 잡지 등을 팔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영선고개를 넘자 국제시장 사거리. 사거리에서 곧장 가면 국제시장이고 오른쪽으로 틀면 보수동 헌책방골목이다. 함경도 부부를 언급한 안내판에서 보듯 헌책방골목은 전쟁 피난민 덕분에 생겼다. 그들이 미군 부대에서 나온 잡지며 피난 보따리에 섞인 고서를 내다 팔면서 윤곽이 잡혔고 골격이 섰다. 피난민은 여기서 생계를 이었으며 다시 일어섰다. 영주동 피난민이 아침저녁 오르내리며 재기를 다지던 신생의 길이 영선고개였다.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전쟁 피난민이 걸었던 저 길. 하루아침에 타향으로 내몰리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로 내몰린 삼팔따라지 억하심정이 스며들어 딴딴해진 길이며 넘어지면 발딱 일어서고 넘어지면 발딱 일어서던 칠전팔기로 딴딴해진 길이다. 나이 들어 다시 걷는 길. 누나와 형을 따라 졸래졸래 간신히 넘던 고갯길이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 같다. 낮고 좁고 가늘게 보인다. 내 잘못인가 싶어 마음이 무겁다. 하늘마저 구름이 무겁다.

 

▶가는 길=시내버스 43, 86, 186번을 타고 ‘중구청·메리놀병원’에서 내리면 된다.

 

 

동길산 시인 dgs1116@hanmail.net


※이 기획은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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